공유마당에
필사하기 좋을만한 시가 보여서
공유하려고 해요 : )
너무 짧지 않고
적당히 긴 어문이라서
부담없이 필사하기 좋을듯 합니다.
1.
달의 추격 / 윤은하
나에게 속삭인 것이 달이 맞는가,
시선이 하늘로 향했을 때
맞아, 바로 그 숲 속에 원하는 것이 있다네.
그것이 그가 누군가를 붙잡고 가는 길일지라도!
밤은 어쩌면 울창한 사고의 늪,
다리를 휘감아 당기는 것은 밤의 이름을 앗아가 버린 그다.
그에게도 달의 속삭임이 전해졌을까.
별의 잔해를 어둠에 흩고,
사색의 증거들을 펼쳐 밟아 이 밤의 다리를 건너갔을까.
아니요, 그는 항상 달빛을 등불 삼아 길을 걸었어요.
나는 그를 볼 수 없었지만 어디선가 흐르는
그의 시간은 분명 마디마디가 절단되고 있었죠.
달빛이 구름에 숨어도 찬란한 밤이구나.
달을 등지고 가자, 그의 발은 멈추지 않으니.
그의 뒤를 쫓아라, 그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가.
곧 새벽이 와요.
부디 늪을 거두고 고운 흙길을 그의 걸음 앞에 놓아주십시오.
어둠을 거두고 그의 눈길이 닿는 곳에 환한 빛을 내려 주소서.
숲의 침묵을 깨는 것은 그의 분주한 발걸음인가,
아니면 그를 쫓는 나의 것인가?
깊은 밤의 색을 둘러 입은 그가 뒤를 돌아본다.
사방이 고요하니, 곧 들켜버릴지도 몰라.
숲의 색을 걸쳐라.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아무런 기척 없이 가만히 서있었어요.
그러나 들리는 것은 별이 부서지는 소리뿐.
그가 푸른 숲으로 간다.
달이 그와 그의 손에 잡힌 이를 인도하는 곳.
하얀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르는 곳.
어둠이 깊어지면 추월한 달빛은 하얀 조명,
들리지 않는 울음소리가 무대의 서막을 알린다.
아름다운 파랑에 물든 길로 나와 사랑의 춤을 청하자.
음률을 따르지 않는 왈츠에 숲이 타오른다.
불길 대신 하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구나!
곧 새벽이 와요.
그렇다면 그대의 손등이 아닌 이 땅에 입을 맞추자.
영원처럼 오지 않던 새벽이 들려온다.
그 생명의 소리가 적막을 찢거든,
마른 잎들에 이슬이 맺히거든,
두 귀와 두 손을 기꺼이 적시어 그의 멎어가는 심장에 쏟아붓겠나이다.
2.
파랑(波浪)은 블루 / 윤은하
청록의 숲은 물결처럼 흔들리고
이따금 들려오는 유율 타악기의 소리
젖은 흙내음 맡으려 열어둔 창문에
경계도 모르는 네 기억이 들이친다
이맘때 네가 들려준 노래를 틀고
관객도 없이 추는 한낮의 블루스
리드도 없이 헤집어 놓는 고운 손에
크고 작은 파랑이 이는 나의 춤사위
이 비는 타오르는 대지를 식히려
차가운 위로의 입맞춤을 퍼붓는데
아직도 한여름의 해 아래 있는 듯
내 마음은 끓어 넘쳐 눈가에 스며
이명처럼 귀에 울리는 너의 목소리가
세상을 덮은 빗소리보다 크고
차디찬 창살 대신 더운 마음을 두드려
나는 너에게 잠긴 하루를 보내
오늘은 그런 꿈을 꾸었어
나는 울고 있는데 너는 미소를 짓고 있는 꿈
아니, 입꼬리 끝에 한 뼘의 슬픔이 걸려 있던 꿈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결국엔 산산이 깨어지고 흘러
베갯잇에 방울방울 맺히는 꿈
잘 도착했니
그칠 줄도 모르고 온통 적셔버리고 마는
다정한 네 이름 새겨진 연파랑빛 편지가
3.
여름밤이 밝아요/윤은하
한여름의 해가 저물어도
여름밤이 밝아요
별이 내린 밤에 손을 잡고 걸어요
곁에 있어도 그리워 돌아보는
당신과 닿고 싶은 마음이에요
달이 흐르는 시냇가를 걸을까요
색 조명 어린 물빛처럼 번져오는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은 밤이에요
사랑을 속삭여 주세요
귀를 간지럽히는 풀벌레들의 노래처럼
밤을 어루만져 주세요
무더운 공기 속 달콤한 바람 한 조각처럼요
쉽게 흩어질 맥주 거품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삼키기에는
여름밤이 밝아요
모두가 잠들지 못하는 밤
달의 뒤편에 숨어요
아 당신과 보내지 않기에는
이 여름밤이 너무나 밝아요
4.
두고 가는 계절 / 윤은하
사랑이 끝나지 않아도
떠나야 할 때가 있지
미처 말하지 못했어도
두고 가는 것이 있지
잠에서 깨어날 너를 위해
다정한 햇살을 한 겹 덮어 두고
무더운 열기에 시들어 갈 땐
구름 한 조각을 펼쳐 놓았어
일몰의 무거움을 덜어줄
바람 한 줄기를 불어 두었고
짙게 내린 밤의 어둠에는
그리운 별 하나를 띄워두었어
그날을 위하여서는
너에게 계절을 선물하고 가지
너를 위하여서는
붉은빛 잃은 입술에
알알이 싱그러운 열매도 머금고 가지
나를 위하여서는
기억 너머 사라진
우리의 빛나던 청춘을 매만지며 가지
사랑을 말하지 못해도
두고 갈 계절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가지
사랑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남긴 계절일 테고
순간의 사랑이 있었다면
말없이 이어질 계절이 남았음을
잊지 않기 위해
품 안 가득 끌어안은 채로 그렇게 가지
5.
가을로의 낙하(落夏) / 윤은하
꽃분홍의 나날들을 사랑해요
너는 움트는 몽우리를 노래했지만
나는 사실 짙은 브라운을 사랑해
너에게 낙엽의 음성으로 속삭였지
분홍을 담은 입술은 사랑스러웠지만
브라운의 눈동자는 나를 살아가게 해
꽃잎에 닿던 다정한 너의 입맞춤처럼
메마른 고독에도 나의 숨결이 닿을까
갈색의 부재에 우거진 녹음(綠音)으로
무심히 채운 계절의 마지막 장을 펼쳐
꽂아둔 책갈피가 선선히 낙하하는 날엔
나는 바래진 낙엽이라도 조심스레 주워
너의 페이지 사이에 곱게 끼워두겠다고
나는 눈을 감아 가을로 가을로 흘러가고
가을로의 초입에서 너를 다시 마주하고
그 걸음 앞에는 부서진 음성을 흩뿌리고
머리 위로는 그리움의 조각을 쏟아내고
그러면 너도 분홍빛 미소를 머금고
내가 건넨 고독의 표면에 키스하고
우리는 순백의 계절까지도 걸어가지
그렇게 적어둔 갈색의 편지를
너의 마른 옷깃에 사뿐히 올려둔 순간
가을로의 길목에서는
아마도
여름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 같아
6.
물결이 되어 / 윤은하
물기 하나 없는 네 말은 내게 닿으면 흘러내려
몸을 덮은 수면에 섞여 그 모습을 감춰 버렸네
너를 만져보려던 손이 길을 잃어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한 건 둘 중 누구였을까
투명하던 방울이 파랑의 일부가 되는 것은
차가운 네 미소가 내게 번지는 것과 같아서
습기 한 점 없던 가슴에 맺히고 스며
붉은 피와 더운 숨에 보란 듯 뒤섞여
물기 하나 없는 네 말은 내게 닿으면 흘러내려
몸을 덮은 수면 아래 온통 네가 고여 버렸네
너를 헤집던 손을 거두고 몸을 뉘어
물이 몸에 번지고
짙은 물결이 되고
가득 넘쳐흐르고
물의 사고(思考)가 일어나 일부가 되어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한 건 둘 중 누구여도 좋다고
즐거운 필사 되세요 ^ㅡ^🖤🖤🖤
출처링크
여름밤이 밝아요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371594&menuNo=200026
파랑은블루: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371593&menuNo=200019
달의추격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372615&menuNo=200019
믈결이되어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372615&menuNo=200019
두고가는계절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371595&menuNo=200019
가을로의 낙하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372614&menuNo=200026
라이센스 링크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4.0/deed.ko
공표/창작연도 : 2024. 09
작품 문의처 : yuneunha05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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